한계 상황 속에서 바꿔 나가야 할 것과 지켜 나가야 할 것
들어가며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불확실성의 파고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기후변화, 크고 작은 국가 간 분쟁 등 지정학적 이슈부터 에너지자원 패권주의, 미·중 무역분쟁, 자국이익 중심주의 등 국제 정치 이슈까지 산업구조에 미치는 변수들이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AI,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어느덧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은 기존의 생산, 소비방식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을 위기로 몰았으며 인류의 생활방식을 일거에 바꿔 놓았다. 우리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 국제환경의 변화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일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표준에 맞춰 적응해야 하는 이른바 뉴 노멀 시대를 탄생케 했다.
뉴 노멀 시대에 가장 큰 도전을 겪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글로벌 기업이다. 기업의 일상, 핵심가치, 가치창출 프로세스를 하루아침에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거대 기업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지금까지 몸에 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고 새롭게 적응해 나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혹자는 ‘뉴 노멀(New Normal)’이라 쓰고 ‘크게 놀람(Big Surprise)’이라고 읽는다는 자조섞인 이야기를 한다. 과연 뉴 노멀 시대에 어떤 전략으로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뉴 노멀 시대 생존전략: 무엇을 버릴 것인가
해외 경영학계는 뉴 노멀 시대 생존전략을 지난 10여 년 전부터 탐구해 왔다. 많은 논문, 저널, 미디어, 도서 등을 통해 제시된 학자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뉴 노멀이라는 불확실성 시대를 대응하는 최선의 방안은 바로 전략적 탄력성과 민첩성으로 귀결된다. 지금의 경영환경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고 경영활동은 이해관계자들 간에 더욱 복잡하게 연결되어 전개되고 있으니 이 상황을 명확히 사전분석하여 대응한다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환경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대응해 나가다가 기회가 포착된다면 언제든 선점할 수 있도록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으로 단단히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핵심은 경쟁사보다 먼저 시장에서 기회를 포착해 사업화해내는 것이다. 이는 해당 조직 자체를 탄력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이란 외부세계와 원활한 소통을 유지하며 시장과 소비자의 트렌드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는 조직을 뜻한다.
변화에 대응하기 하기 위해 빅데이터를 기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다양한 기능을 동시에 주도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는 역량있는 인재들로 구성된 조직을 뜻한다.즉, 필요자원을 적재적소에 재배치할 수 있는 조직을 뜻한다. 국내 대표 글로벌 기업들, 해외 대표 플랫폼 기업들이 비교적 각자의 시장을 지금도 선도해 나가는 것은 이런 전략적 민첩성과 탄력성 그리고 조직의 기민함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략적 탄력성과 민첩성은 적어도 지금 대부분의 관리자들에게 키워드임이 틀림없다. 아마존의 베조스회장은 끊임없이 시장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회사를 살아남게 할 전략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구글같이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으로 변하는 길만이 뉴 노멀 시대의 극한 한계를 이겨낼 전략임이 진리화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실무자들은 이들을 흉내내며 없애고, 줄이고, 바꾸고, 간소화 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소통이 자유로운 조직문화,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할당하는 수평조직, 업무수행도 가급적 팀, 부서, 기업 간 협업으로 진행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탄력적 조직이야말로 소비자의 기호, 기술변화, 경쟁업체의 동향을 예의주시하여 변화를 읽어내고 대응하는 데 유리하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에 비해 소비자와 이해관계자의 관심을 예기하고 기술, 시장, 제품과 혁신을 훨씬 더 편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통이 원활하고 수평적인 조직은 뉴 노멀 시대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만능처방일 수 없다.
구글, 아마존, 애플의 조직관리가 나의 성공 방정식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따져보면 지금같은 변화의 흐름과 혁신요구는 과거에도 늘 있어왔지만 언제나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이 될 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변화와 혁신으로 인해 소중한 가치들이 버려지거나 등한시되는 것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았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민첩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업의 특성에 따라 지금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늘 해오던 원칙을 지키면서 버텨 나가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치 링 위의 권투선수들이 기민하게 상대의 펀치를 피해 다니는 것(Agility)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 꿋꿋이 어떤 공격에도 버텨줘야 하는 맷집(Absorption)도 필요하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나 조지 포맨(George Foreman)을 전설의 복서로 만든 것은 상대의 펀치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 못지않게 상대가 누구이건 어떤 공격에도 피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는 자신만의 맷집과 인내 때문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민첩함과 변화의 흐름속에서도 지켜내야 할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 무엇인지 고려해 볼 일이다.
뉴 노멀 시대 생존전략: 무엇을 지킬 것인가
전략적 변화가 요구되는 지금, 놓치거나 버리지 않고 지킨다는 의미는 기업이 구태하고 수구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경쟁사보다 더 버텨낼 원천을 찾아내 잃지 않고 유지한다는 의미다. 80년대 중반 애플의 노트북이 처음 출시됐을 때 시장은 이미 레드오션이었고 소비자들의 평가는 혹독했다, 폭락한 애플 주가는 회복될 기미가 없이 2000년대를 맞이했다. 다른 모델과 디자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애플은 변화를 꾀하기보다 확고한 5% 충성고객을 잃지 않고 더욱 공고히 하려는 고군분투를 20년 가까이 지속하며 기회를 모색했다. 그 오랜 기다림이 오늘의 애플 Ipad와 노트북을 탄생케 했다.
소비재 산업만큼 변화무쌍하고 성공법칙을 찾기 힘든 산업도 드물다. 프랑스의 Danone과 미국의 P&G는 일찍부터 중국, 러시아 등 신흥시장의 기회를 포착하였고 진입을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겪어보지 못했던 두 시장을 대하는 두 회사의 접근법은 달랐다. Danone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기민하게 대응하는 데 중점을 두어 현지 업체와의 협력을 통한 리스크 관리에 치중한 반면 P&G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역량과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비즈니스 모델로 단독진출의 길을 택했다. 훗날 Danone은 현지 합작 기업들과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리다 결국 중국 등 신흥 시장을 철수했으나 시련에도 자기의 길을 고집한 P&G는 신흥 시장의 승자로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변화가 요구되는 환경에서도 잃지 않고 지켜내야 할 것 무엇인가?
첫째로 회사를 버텨내게 해줄 핵심 역량과 가치를 꼽을 수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기업들은 변화의 1순위로 인력 감축이나 조직 축소를 단행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회사의 소중한 가치와 시련을 버틸 맷집이 약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장상황이 어려워질 때마다 인력 감축으로 대처해 왔던 GM과 직원을 줄이는 대신 새로운 노사관계 수립과 규정을 개선하며 위기를 돌파해 왔던 TOYOTA의 지금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동차 시장의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 TOYOTA는 아직도 시장을 리드해 가고 있다.
둘째, 기업을 매각하고 분사하는 것만이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규모가 줄었다고 조직의 민첩성과 탄력성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독특한 자신만의 관리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 변화에 대처하는 전략적 자세다. 항공 산업의 부침은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늘 세계 모든 항공사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외부환경요소였다.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수익성 악화나 적자로 허덕일 때에도 에미레이트항공이 비교적 견고한 성장과 수익을 유지했던 비결은 승무원 숫자를 줄이고 고객 서비스를 과감히 간소화하여 비용 절감에 성공해서가 아니다. 주문 항공기나 서비스 노선을 축소하지도 않았고 기존에 벌려 놓았던 호텔, 리조트, 여행사 등 관련 다각화 사업도 그대로 유지했다. 에미레이트항공은 기존의 사업군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각 사업영역에서의 독특한 고유가치에 기반한 경영관리방식을 찾아 각자의 방식으로 난국을 타개하도록 했다. 구조조정으로 일관하던 타항공사와는 사뭇다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회사의 고유 가치와 기업 문화는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 민첩성과 탄력성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회사가 추구하려는 궁극적인 가치만큼은 모든 구성원들이 인식해야 한다. 기업 문화는 표현하지 않아도 모든 구성원을 같은 방향으로 향하도록 각인시키는 암묵적 언어다. 조직의 민첩성과 탄력성이 자칫 이를 훼손시켜 소속감과 공동의 목표가 사려져서는 안된다. 코카콜라나, 마이크로소프트, 쉘 등 굴지의 세계적 기업들은 더욱 더 적응하기 어려워지는 외부 환경보다 점차 퇴색되어 가는 직원들 간의 공유가치가 기업을 위기에 빠뜨릴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단정하고 있다.
마치며
변화와 혁신의 사회적 요구는 기업들을 끊임없이 탈바꿈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업 역시 전략적 탄력성이나 민첩성으로 변화의 요구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켜나가야 할 고유 가치와 역량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에너지 산업은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자원국 간 에너지패권 등 정치적 역학 등 미래를 가늠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GS칼텍스 역시 급변하는 에너지 환경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더 노력하고 있으며 기존의 원유 정제사업을 넘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 환경투자, 에너지 생태계 확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변화를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GS칼텍스를 오늘에 이르게 한 경쟁력의 원천과 핵심가치는 혁신의 이름으로 파괴되기보다는 보존하고 공유돼야 할 대상이다. 어떤 어려움도 버틸 수 있는 맷집은 바로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