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에 제작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이란 지도가 있습니다. ‘경성부(서울)를 크게 본다’는 의미처럼 항공사진과 정밀지도를 참고하여 입체감 있게 만든 특이한 지도입니다. 지금의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충체육관 자리는 운석이 떨어져 움푹 패인 것처럼 커다랗고 둥근 모습인데 그 용도가 저수지(연못)인지 주차장인지 자못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장충’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장충단공원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장충체육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곳에 체육관으로 지어졌을까? 등 여러 질문도 생겼죠.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담긴 다양한 장충체육관 이야기를 지금 공개합니다.
장충체육관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TOP4
‘장충’은 ‘충(忠)을 장려한다’는 의미
1900년에 고종 황제는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년(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순국한 대신과 장졸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 건립을 위한 소칙’을 원수부(元帥府, 국방부)에 내립니다. 원수부는 1900년 11월 10일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어영청 분영인 남소영(南小營) 터에 제단(祭壇)과 건물을 짓고 ‘장충단(奬忠壇)’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웁니다. 당시 장충단은 15칸의 건물과 3층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장충’은 ‘충(忠)을 장려한다’는 뜻입니다.
비석의 앞면 글씨는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이, 뒷면의 비문은 원수부 회계국총장이었던 민영환(1861~1905년)이 지었습니다. 다음해인 1901년 장충단은 임오군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당시 순국한 신하들의 신위를 함께 모시면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충신들을 기리는 ‘추모공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사는 ‘매년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지냈는데, 군기•군악대가 동원되고 각부 대신과 군부대신 이하 각 위관(尉官) 및 병졸들이 참석하여 순국선열을 기리며 엄숙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므로 이곳은 조선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추모공간’에서 야유회 및 운동회가 열리는 ‘위락(慰樂)공간’으로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순국과 저항의 상징인 장충단 제사를 폐지합니다. 그리고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았던 이 일대를 1919년 9월 ‘경성 도시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대규모 공원으로 변모시킵니다. 벗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고 산책로, 운동장, 잔디밭, 공동화장실 등을 만들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서울 시민들의 산책지, 각종 사회단체의 운동회 및 야유회가 개최되는 곳, 청소년들의 야외 체력단련의 장소 등으로 이용하게 합니다.
당시 장충단공원의 영역은 지금의 국립극장, 반얀트리클럽, 한국자유총연맹, 장충체육관을 아우르는 것으로 1940년 기록에 의하면 공원 전체면적은 무려 41만 8천 평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장충단공원에 운동장, 양궁장, 자전거 경기장, 스모 경기장 등을 추가로 건설하고 일본정신박람회를 개최하여 조선인을 신민화(臣民化)하는 장소로 이용합니다.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분들에 대한 추모 사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독립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사와 활동들이 추진되었고 장충단공원은 그 중심 장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순국의열사봉건회에서는 순국선열을 위한 사당을 장충단에 건립하고, 안중근추모준비회는 장충단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녹여 같은 곳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만들며, 남조선과도입법위원에서는 장충단 국립기념공원을 설치하려는 계획들이 논의되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왜곡되고 변형되었던 장충단을 복원하고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장충체육관, 최초의 실내 체육관으로 새롭게 등장
대경성부대관 지도에서 둥글게 패인 모습의 운동장은 1955년 육군체육관으로 개관되는데 당시 노천체육관으로 대한민국 최대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후 서울시는 국방부로부터 체육관을 인수한 뒤 1963년 2월 1일 최초의 실내 체육관으로 개관합니다.
“당시 건축기술로는 어려운 직경 80m의 대형 철골 돔(철골 트러스 32개, 환상형 트러스 13개)으로 설계되어 완성시킨 작품이며, 건축물의 의장적 측면에서도 우둔하게 표현되기 쉬운 돔의 형태를 구조체와 잘 조화시켜 거대한 매스(Mass)를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는 조형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코트를 중심으로 본부석 및 하반 가변 관람석과 상단 관람석이 위치해서 중앙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각 관람석의 위치에 따른 시각적 사각지대를 만들지 않는다.”
(출처 : 장충체육관 홈페이지)
한편 풍요롭지 않던 1960년대~70년대 장충체육관에는 국민들을 흥분시키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김기수 선수가 한국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올랐고 프로레슬러 김일은 저녁마다 전국민을 TV 앞에 앉게 한 뒤 다음날 등교길, 출근길, 술자리까지 이야깃거리를 만들곤 했습니다.
잠실학생체육관(1976년)과 잠실실내체육관(1979년)이 들어서고 나서도 대형 공연과 각종 체육•정치•문화 행사는 계속 열렸습니다. 경제가 급성장하던 1980년대는 3S정책과 더불어 농구대잔치, 백구의 대제전, 천하장사 씨름대회, 올림픽경기(태권도, 유도), MBC 대학가요제 등이 치러졌습니다.
장충체육관으로 인해 유명세를 탄 장충동족발
해방이 되자 해외에 살던 동포들이 한꺼번에 귀국하고 북한에 살던 사람들도 월남하자 이들을 일시적으로 보호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장충단공원 안에는 3만 평이 넘는 일본육군병영이 있어 서울시에서는 이를 활용하여 전재민구제연합회본부(戰災民救濟聯合會本部)를 설치하고 원호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근처 주택지에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가옥도 적지 않아 주택을 알선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실향민 몇 분이 장충동에서 족발을 팔기 시작했는데 장충체육관이 들어서고 난 뒤 장사가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행사를 마친 후 수천명의 참가자들이 일시에 체육관을 나서는 모습은 지금 잠실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잠실새내역 근처 먹자골목으로 몰려가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현재 전국 각지에 ‘장충동 족발’을 상호로 삼은 음식점만 해도 4,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남산 답사를 할 때 서울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만나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올 때마다 지하철역 이름을 ‘장충역’ 혹은 ‘장충단역’으로 정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서울시는 지하철역 이름을 정할 때 다툼과 논쟁을 피하기 위해 ‘지하철 역명 제·개정 기준 및 절차’라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역명은 ‘①옛 지명·법정동명·가로명 ②역사에 인접하고 있는 고적, 사적 등 문화재 명칭….’을 우선하여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춘단’이 ‘동국대’보다 더 오래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므로 ‘장충(단)역’이 더 맞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봅니다. 혹은 둘 다 함께 적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참고 자료]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 정재정․장규식․염인호, 혜안, 1998.
「제1공화국 시기 장충단공원의 정체성의 변형 과정」 김수자(이화여대)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에 나타난 경성, 서울」 한동수(한양대)
『大京城府大觀(대경성부대관)』 서울역사박물관 장충체육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