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준비, 유비무환

20세기 초 SF소설의 개척자들은 많은 우주괴물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괴물은 무한변화를 하는 괴물이었죠. 인간이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대로 변하는 괴물, 자신도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괴물이 최고의 공포였습니다.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변화란 이전부터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인류는 우주가 아닌 지구에서 그런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글로벌화와 너무나 빠른 기술발전으로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분명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술인데, 그 결과가 지성의 한계를 넘어가 버립니다. 유비무환이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에도 변화는 늘 사고영역의 밖에 있었고,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소수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유비무환의 성공과 실패의 생태학은 어떤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훈련과 전쟁준비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동원령을 내리고 출동준비를 마쳤을 때 전라좌수영의 준비태세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더 근원적인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고려 말까지 국방정책은 오직 중국과 만주의 침공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주 전장은 육지였습니다. 왜구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오직 해적으로 간주되었으므로 경찰력만으로 충분했죠. 그래서 군대도 육군만 존재했고, 해군은 육군 내의 작은 조직이었습니다. 그런데 14세기부터는 그것이 곤란해진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중국인들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동시에 쳐들어 온 것이죠. 문제는 이 왜구가 이전의 해적떼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려의 통치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통찰합니다. 대규모의 왜구는 군사적 침공을 감행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14~15세기에 정부는 이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 육군만 있던 군대를 육군과 해군으로 이원화합니다.

해군의 전함과 전술도 해적떼를 쫓는 작고 경쾌한 쾌속정 위주가 아니라 전면전을 대비한 전함 체제로 육성합니다. 이런 큰 배는 속도가 느려서 실제 해적떼를 쫓는 데는 불편했습니다. 건조비용과 유지비용도 상당하고 배를 몰기도 힘들었죠.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런 선견지명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육군은 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왜구가 쳐들어오면 압도적인 해군전력으로 해상에서 격멸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위험하죠. 1선에서 적을 격멸한다는 방법은 1선이 뚫리면 파멸입니다. 조선도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2선, 3선 방어가 필요한데, 2선부터는 육상전입니다.
육상전에 대비하려다가 조선은 난관에 봉착합니다.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비해서 육군을 육성하려면 많은 비용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신분제, 사회운영원리까지 바꿔야 합니다.

내가 크게 변하지 않는 선에서 요구하는 유비무환. 즉, 큰 배를 만들고 훈련을 요구하는 유비무환이라면 어떤 집단이든지 기꺼이 감내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는 유비무환. 즉, 내가 살아온 방식,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노력, 사회의 질서, 도덕, 생활방식을 바꿔야 한다면 대부분의 조직과 사람들은 주저합니다. 유비무환보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의지하거나,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는 등 실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무의미한 노력만을 반복하게 됩니다. 조선의 육군이 꼭 그랬습니다. 문제를 알면서도 외면하고 전국을 들쑤시며 무기를 점검하고, 성을 다시 쌓고, 예비군을 동원해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전쟁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수많은 조직과 기업이 유비무환에 실패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반성문을 썼습니다. “미처 몰랐다. 우리가 게을러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민중들이 어리석어서 전쟁 준비를 싫어했다.” 이 말의 절반은 거짓입니다.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전술체제는 그대로 유지한 것이 그 반증입니다.

유비무환에는 ‘가능한 유비무환’과 ‘불가능까지는 아니지만 힘들고 어려운 유비무환’이 있습니다. 역사에서 승부는 대개 후자에서 갈립니다. 이것은 고대, 춘추전국시대부터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예측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예측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을 회피하고, 변화에 완전히 뛰어들지 못하고,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심정으로 ‘가능한 유비무환’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유비무환에 도전하는 집단만이 예측 불가능한 현시대에서 생존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