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 초창기인 90년대 중반, 웹 브라우저 시장은 ‘넷스케이프’가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시장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웹 브라우저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익스플로러(IE3)였습니다.
당시 IE3 개발 프로젝트는 큰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가 보안을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관행과 거리가 멀었던 까닭입니다. IE3개발팀은 3개월 만에 제품 아키텍처의 첫 베이스라인을 대중에 제시하였습니다. 곧이어 30% 정도가 개발된 알파 버전을 공개하였고, 한 달 만에 다시 60% 정도를 구현한 퍼블릭 베타 버전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회사는 두 달 후엔 80% 정도를 구현한 두 번째 퍼블릭 베타 버전을 보여주더니 채 1년도 안 된 1996년 8월 정식 IE3를 출시하였습니다. 가장 고객 친화적인 웹 브라우저로 인정받은 IE3는 3년 만에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변화에 대한 현명한 대응, 애자일(Agile)
마이크로소프트가 IE3에 사용한 개발 방식은 애자일(Agile)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애자일은 한 마디로 ‘짧은 주기의 반복 실행을 통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으로 부상한 애자일은 이미 실리콘밸리에서 대세가 되었습니다. 아마존이나 자포스와 같은 혁신 기업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애자일 기법이 활용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애자일 방식에서는 앞을 예측하거나 계획을 정교하게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일을 작게 쪼개고, 우선순위를 가려 중요한 것부터 반복적으로 실행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시행착오가 많은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변화에는 민감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대처하면 되므로 끊임없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가면서 필요한 요구를 반영하고 수정합니다. 이러다 보면 애초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애자일은 본질적으로 ‘고객지향적’입니다. 계약과 협상보다 고객과의 협력을 강조합니다. 계획의 준수보다 변화에 민첩한 대응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작업에서는 프로세스 자체보다 팀원 간 상호작용에 우선 순위를 둡니다. 문서로 된 것보다 소프트웨어 자체에 집중합니다. 최종 목적지는 ‘계획의 완수’에 있지 않습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것’에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작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애자일, 그 확장성에 대하여
최근 들어 환경적 변화는 극심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날에 대한 예측은 더욱 어려워지고 고객의 요구사항도 갈수록 까다로워집니다. 경영전략의 수정 역시 빈번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략의 개발 초기에 모든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맞춰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전체 계획 수립 및 단계적 달성’이라는 전통적 개발 방식은 더 이상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죠.
애자일의 필요성이 커진 또 다른 이유는 IT 시스템의 수명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무리 많은 공을 들여 오랜 시간 개발한 소프트웨어라 하더라도 업그레이드되기 전까지 사용되는 기능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과 실행, 개방과 효율성, 스피드와 민첩성 등이라는 애자일의 특징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덕목들은 개발 프로세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기업경영 전반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확장성 또한 지내고 있습니다. 기업경영에 활용 가능한 철학과 원칙을 담고 있기에 애자일은 기업과 경영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애자일을 경영 전략으로 활용하다
최근 들어 애자일을 단지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세스로만 보지 않고 경영 전략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습니다. 미국의 솔루션 회사 엑스텐시스나 소셜미디어 기업 비투닷컴은 애자일 프로세스에 기반을 두어 엔지니어링 조직을 재구성한 기업입니다. 런치미트를 판매하는 기업 랜드오프로스트는 시장 예측과 고객 개발에 애자일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애자일 기법을 이용해 고객서비스를 개발하는 법률회사나 코칭 방식을 바꾸는 코칭 기업들도 늘고 있습니다.
유행 주기가 짧아지는 패션 산업의 자라, H&M, 유니클로 등과 같은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애자일 활용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패션쇼를 통해 다음 시즌에 물량을 준비하는 전통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트렌드를 예측하되 한번 정한 디자인은 초기 생산 물량을 15% 이내로 유지할 뿐입니다. 이후 고객 반응에 따라 제품별 생산비율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애자일한’ 조직은 가능할까?
애자일 정신은 조직문화와 리더십에도 적용됩니다. 일본의 서비스 기업 무사시노를 이끄는 고야마 노보루 사장은 “언젠가 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안 하겠다는 것과 같다. 지금 바로 할 것인지, 아니면 평생 안 할 것인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라”고 충고합니다. 조금이라도 하는 편이 나은 것 같으면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기고, 만약 도중에 아니라고 느껴지면 그때 가서 그만두면 된다는 것이지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보다 당장 결정하고, 당장 잘못을 알아채고, 당장 변경하는 신속함과 민첩함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중한 현자(賢者)보다 실행력 강한 용자(勇者)의 리더십이 점점 더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빠르게 행동하고, 빠르게 후회하며, 빠르게 배우는’ 용기 있는 리더라야 애자일한 조직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제도와 시스템은 형식보다 내실을 중시하고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향으로 고쳐가는 것이 첫걸음이 됩니다. 예를 들면 채용, 평가, 보상, 승진 등의 인사관리에서 연간 단위로 정형화하는 기존의 관행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더 효과적인 시기에 실행되어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높이는 방식으로 바꿔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하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필요한데 이는 생각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보다는 상황 대응력이 높은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매뉴얼화하고 잘 배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렵고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는 기계론적 접근일 수 있습니다. 창의와 혁신은 ‘중복과 여유’에서 만들어진다고 한 지식경영의 대가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의 말은 애자일한 조직을 추구할 때 새겨들어야 할 지침이라 하겠습니다.
새해를 여는 첫 시작인 1월. 장황한 계획과 목표의 늪에서 방황하기보다 작지만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 도전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업그레이드하는 GSC인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