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활동, 미술치유, 미술치료의 경계
미술이 그 자체로 치유적 힘을 갖고 있다면, 화가인 고흐는 왜 자신의 귀를 자르는 병적인 행동을 한 것일까요? 미술이 치료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그를 행하는 치료자의 역할과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미술 치료의 권위자 박승숙 교수님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이 심리학에도, 의학에도, 교육에도, 예술치료에도 주요 개념의 역사와 실천상의 다양한 시도의 변천사가 있습니다. 미술치료는 미국의 경우 미국미술치료협회(AATA)가 만들어진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움직여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표현예술심리치료협회와 대구를 거점으로 한 한국미술치료학회가 기존해 있었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소개되면서 첫 미술치료 대학원 과정이 만들어진 1999년을 시작점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다.
치유로서의 미술? 심리치료를 위한 미술?
미술치료계에는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온 기본 개념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치유로서의 미술(art as therapy)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리치료를 위한 미술(art for psychotherapy)입니다. 전자는 미술 자체의 치유적 힘을 더 강조하는 쪽이고, 후자는 심리치료에 미술이 도구적으로 쓰인다는 입장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미술치료이므로 미술의 치유적 힘에 의존하여 심리치료를 하는 것이니 둘이 같은 얘기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둘의 관점은 조금 다릅니다.
미국 미술치료의 초기 역사를 보면 처음 미술치료계를 움직이고 발전시켜온 선두주자들은 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던 미술작가나 미술교육가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석사과정들이 미술교육과에 속해 있다가 별도의 학과로 독립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정신분석이나 정신의학에 연계해서 미술을 검사나 치료적 도구로서 활용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미국 미술치료 협회의 역사를 보면, 그 두 파의 선구자들이 은근히 대립하며 ‘미술 그 자체가 치료다’, ‘심리치료에서 미술은 아주 효과적인 도구다’라는 싸움을 했습니다.
저는 미술교육과에 속해 있다가 독립해 나온 미술치료 대학원 과정을 졸업했고, 미술이 치유적이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17년이 흐르는 동안 제가 내리게 된 결론은 미술은 치유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치료가 되려면 누가 어떤 문맥에서 그 미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효과가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술이 아니라 미술을 쓰는 치료사의 자질과 기술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미술이 그 자체로 치유적이라면 미술을 직업으로 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미술가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내 미술을 하는 미술학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최소한 정신적으로 아프다든지 치유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미술은 성격적인 문제나 대인관계적인 문제 혹은 정서적인 문제를 더 심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정신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미술치유와 미술치료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사라지는 미술교육과 새로이 등장하는 미술치료
제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미술치료사로 활동하며 교육계에 뛰어든 것이 1998년입니다. 당시 미술교육은 입시교육 상황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고,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지나면서 방향성을 잃고 뭐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자기가 예술가라고 주장하면 예술가인 시기였습니다. 그 때 미술치료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죽어 있는 미술교육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고 길 잃은 예술에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98년 성곡미술관에서 <치유로서의 미술, 미술치료 전>을 개최했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젊은 작가들에게 ‘당신들에게 예술은 당신의 치유와 상관이 있으며 그것을 강조하여 작품을 소개하고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변화였습니다. 그 전시장의 지하 한 쪽 방에는 미술치료 현장에서 나온 환자들의 작품이 액자에 걸려 같이 소개되었는데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문맥을 제공하는데 있어 미술치료가 힘을 싣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미술치료는 환자들에게 미술활동을 할 기회를 제공하고 예술이 치유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미술치료사들은 빛을 잃은 미술교육을 되살리면서 치유로서의 예술(art as therapy)을 강조했고 예술 활동을 널리 퍼뜨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 때는 ‘치료’란 말보다는 ‘치유’란 말이 우세했고, 미술치료사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치료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의 치유성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예술은 예술치료사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의미와 사회적 효용성을 되찾았습니다. 예술 개념에도 작가 개인의 심리주의와 정신적 치유라는 새로운 길을 터주었습니다.
예술강사와 예술치료사 사이
그런데 2005년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문예진흥원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일자리가 없는 예술가들과 예술학도들을 위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죽어가는 예술교육을 되살릴 방안으로 ‘성장과 치유를 위한 체험형 예술교육’이라는 새로운 문맥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 사업은 빠르게 추진되어 ‘예술강사’들을 써서 예술치유 사업을 전국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예술강사가 된 예술가들과 예술교육가들은 그동안 예술치료사들이 일하던 지역 내 커뮤니티로 들어가 각종 지원사업들을 뛰게 되었습니다. 교육부, 복지부, 여성가족부, 노동부, 법무부 등 각종 주무부처에서 지원하는 사업들에 예술강사들이 파견된 것입니다.
2005년 당시 그 사업의 초기 회의에 저는 자문위원으로 참석했는데, 예술교육가와 예술가, 그리고 예술치료사들을 예술강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담당청의 아이디어에 예술치료사들이 심하게 반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예술치료사가 소속될 곳은 보건복지부보다는 문화예술교육 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예술교육가 및 예술치료사들이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 서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효용성을 두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술치료사들의 반발로 예술치료사들은 예술강사 사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에 문예진흥원에서 예술강사 사업과는 별도로 예술치유 시범사업을 추진했고 그 사업이 예술강사 사업과 다르다면 추후 독립된 사업으로 추진하려는 생각을 비쳤습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예술강사들과 예술치료사들의 활동이나 역할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술치료사들이 임상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능과 효과에 있어 분명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사업에 대해 평가하라는 임무가 제게 주어졌습니다.
기획 단계에부터 관여하여 각 단체가 기획한 프로젝트 실행 현장에 나가 예술치료사가 활동하는 상황을 보니, 저도 미술치료사지만 예술치료가 예술강사의 사업과 다르다는 주장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술치료가 예술강사들의 활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강사들보다도 예술활동을 도모하는 데 있어 더 추진력이 없고 효과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자신들은 예술강사들과 다른 ‘임상’을 하기 때문에 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예술치료사들이었지만, 예술치료사들은 심리치료를 하고 있지 않았고 예술활동 만을 펼쳐내고 있었습니다.
미술교육과 미술치료의 분화
예술치료는 결국 치유와 성장을 위한 예술교육인 걸까요? 여기서는 전통적인 학교 수업에서처럼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의미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예진흥원이 시도한 예술강사 사업에서처럼 모든 사람에게, 그 중에서도 특히 치유와 성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술활동의 장을 펼쳐주고 그 활동이 최적으로 벌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미술치료사들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각 사람들이 미술을 통해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미술강사이기도 합니다.
교육부는 2011년 성명발표를 통해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를 해결할 것은 예술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미술, 음악, 체육 등을 입시 중심의 교육 밖으로 빼서 학교에 적극적으로 다시 투입시켰습니다. 거기에도 예술교육가와 예술치료사들이 불려가 협업을 요구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교육부의 대대적인 사업이 학교 내 오케스트라 사업으로 우선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술 체험이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다 보니 젊은 예술가들, 예술교육가들, 예술치료사들이 모두 커뮤니티 내의 원활한 소통과 치유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예술 프로젝트, 예술교육 프로그램, 예술치료 프로그램들이 서로 뒤섞이며 그 속에서 역할이 불분명해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집단을 상대로 하는 프로젝트들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희미합니다.
미술교육의 한 전문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가 따로 독립해서 별도의 학과가 된 미국 미술치료의 역사가 말해주듯, 지금의 국내 상황에서 미술치료는 더 이상 미술교육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미술교육은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미술가들도 사회의 치유와 그 안에서의 소통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받고 자신들의 활동을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부터인가 미술치료사들이 ‘치유’란 말을 접고 ‘치료’란 단어를 더 선호하며 쓰게 되었습니다. 치유라고 했든 치료라고 했든 자신들은 임상가라는 주장을 잊지 않고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활동은 치유 중심이고, 치료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의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술치료의 전문성을 위하여
현재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원을 갖고 있고 가장 많은 치료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것이 미술치료입니다. 음악, 무용, 연극 등과 달리 미술은 미술전공자가 아닌 사람들도 미술치료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예술매체로서의 문턱이 아주 낮습니다.
2010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나온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박종성 외, 『서비스 산업의 자격연구 (1) – 보건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 중심으로』) 현재 미술치료는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나의 직업군으로서 음악치료와 함께 그 전문성과 효과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민간자격으로 자격 검정이 이루어졌지만 조만간 나라에서 민간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공인 자격으로 관리를 하겠다고 고지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현장에 나가보면 다른 예술치료 못지않게 혹은 더 심각하게 미술치료는 그 전문성에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그동안 기준도 없이 수많은 학교와 단체들에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너도 나도 자격증을 주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요? 교육기관이나 단체들은 왜 미술치료의 전문성을 떨어뜨리는 미술치료사들을 배출시킨 것일까요?
다음시간, ‘치유’와 ‘치료’란 단어의 구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