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Electric Power, 소리 없이 굴러갈 미래 자동차 세상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의 봄 날씨가 어떤지. 하늘은 청명하고 햇살은 우리나라 초여름보다 훨씬 따뜻하며 바람에는 습기 하나 없다. 파삭하게 건조하면서도 나른한 날씨. 말이 봄이지, 반소매 셔츠나 반바지를 입고도 살짝 더울 정도의 날씨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현지시각 오후 4시. 저녁식사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겸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나갔더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강렬한 햇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러닝을 하고 있었다. 탱크톱에 숏 팬츠 차림인 그들 사이에 청바지와 폴로셔츠를 입은 채 서 있으니, 누가 보나 미국에 처음 온 아시아 관광객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모자라 목에는 커다란 DSLR 카메라까지 걸고 있었으니……
최고의 기술력!, 메르세데스 벤츠의 B-클래스 F셀
이튿날 새벽, 어제의 그 아시안 관광객은 운전하기 좋은 차림으로 말끔히 갈아입고 기묘한 형광 색 소형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바로 메르세데스-벤츠의 연료전지차, B-클래스 F셀F-Cell이다.
연료전지차는 당연히 전기차의 일종이다. 하지만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 대신 수소를 직접 주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다르다. 이를 연료 삼아 연료전지 스택에서 전력을 생성해 파워 모듈로 보낸다. 거기서 전력을 전기 모터로 배분해 차를 굴린다. 쉽게 말해 휘발유 대신 액화수소를 주입하고 엔진 대신 전기 모터를 돌리는 것이다. 차에 수소를 주입할 때는 공급압력을 700바Bar까지 끌어올린다. 이렇게 하면 충전 량이 많아져 주행거리가 늘어난다. 장점은? 연료 효율이 좋고 소음이 없으며 내연기관 자동차 못지않게 주행성능이 좋다는 것. 단점은? 주유소만큼이나 많은 수소 충전소를 지어야 하는 등 인프라 구축 비용이 엄청나게 필요하다는 것.
아직까지는 수소를 만들어낼 때도 화석연료에 광범위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단점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연료전지차 생산 기술은 확보돼 있지만 인프라 구축은 아직 요원하다. 아무튼 B클래스를 베이스로 한 메르세데스-벤츠 연료전지차를 몰고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북부 새크라멘토까지 1천km 정도를 달렸다. 2박 3일을 꼬박 운전하는데, 솔직히 F1 서킷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보다 힘든 경험이었다.
차는 끝내주게 잘 나갔고, 태평양 바다를 왼쪽에 두고 쭉 뻗은 101 하이웨이는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시속 150km로 달릴 때조차 소음은커녕 맞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전원을 켜고 스르르 움직일 뿐. 캘리포니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이토록 조용한 차를 몰고 교통체증도 없이 뻥 뚫린 도로를 사흘간 달리는 건, 그야말로 ‘잠과의 사투’였다. 알고 보니 전기차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주행 거리와 배터리 무게, 충전 시간만이 아니다. 전기차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간 지금, ‘운전자에게 어떤 재미와 흥분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감성적인 부분이 더 큰 숙제로 남은 것 같다.
전기 스포츠카, 테슬라 로드스터
이와 다른 타입의 전기차를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긴 하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는 테슬라Tesla 같은 회사가 그렇다. 말이 자동차회사지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실제로 구글 본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에 있는 테슬라는 IT 업체에 가까운 탄생 배경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2004년 스탠포드 대학 벤처에서 출발한 이 회사는 로터스 엘리스 차체를 베이스로 개발한(지금은 자체 플랫폼을 쓴다) 테슬라 로드스터를 생산 중이며, 지금까지 1천 500대 정도를 판매했다. 100퍼센트 충전식 배터리로 움직이는 테슬라 로드스터는 가정용 전원으로 3시간 반이면 충전 가능하다. 한번 충전해서 최대 392km까지 달릴 수 있다. 최고출력은 288마력, 0→시속100km 가속시간은 3.7초. 스포티한 외모에 달리기 성능이 멋스러울 뿐 아니라 환경친화적이기까지 하니 한동안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미지 관리용’ 유행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테슬라 연구센터 외곽 약 3km 구간에서 몰아본 로드스터는 화끈한 가속력과 날렵한 핸들링 성능을 과시하며 일반적인 스포츠카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운전석은? 그러나 여전히 조용했다. 자동차기자로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자동차회사들이 그려내는 미래 자동차의 개념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하지만 근본은 달라진 적이 없다. 바로 ‘어떤 형태이든 정답은 전기차’라는 사실이다. 그 동안 전기차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발전했다. 하이브리드와 배터리 충전식 전기차, 연료전지차 등 각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분야의 기술이 고루 양산 단계에 올라 있다. 20세기를 주름잡았던 독일 자동차회사들은 미래에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들의 전기차 제조 기술과 체계적인 준비를 눈여겨볼 만하다.
앞서 말했듯 메르세데스-벤츠는 연료전지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면서 이 기술을 시티 커뮤터City commuter뿐 아니라 SLS AMG 같은 정통 스포츠카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 지난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한 SLS AMG e드라이브는 0→시속 100km 가속을 단 4초에 끝내 V8 6.3리터 휘발유 엔진을 올린 모델과 똑같은 수준의 주행성능을 과시했다.
1978년부터 일찌감치 수소 에너지 연구에 착수했던 BMW는 연료전지 및 배터리 전기차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당초에는 엔진 등 기존 내연기관을 그대로 쓰면서 연료만 휘발유나 경유에서 수소로 바꾼 수소 엔진차 개발에 착수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대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BMW는 아예 저공해 및 전기차에 집중하는 서브 브랜드 아이I를 신설해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이 브랜드에서 처음 선보인 미래형 차가 바로 도심형 소형차 i3와 스포츠카 i8이다. 양산을 앞둔 i3는 배터리를 차체 바닥에 깐 순수 전기차로, 배터리 성능을 높이는 동시에 차체를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무게를 줄였다. 성능은 끌어올리고 몸은 가벼워졌으니 주행 성능은 물어보나 마나다. BMW는 차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아예 탄소섬유 제작회사의 지분을 인수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미래형 1인승 전기차, 폭스바겐의 닐스
폭스바겐이 최근 공개한 업Up! 은 휘발유 엔진을 쓰고 있지만 전기차 구동계도 얼마든 올릴 수 있게 설계되었다. 1인승 전기차 컨셉트 닐스Nils 역시 주목할 만한 미래 아이디어. 차체를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윈도는 모두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해 무게를 최소화했다. 가정용 전기 콘센트로 2시간 만에 충전 가능하며 주행 거리는 65km 정도. 1인승 구조에 무게 460킬로그램의 가벼운 차체, 짧은 충전 시간과 도심지 왕복 출퇴근용에 불과한 주행 거리는 ‘단거리 시티 커뮤터’라는 지향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아우디의 어반 컨셉트Urban concept 역시 이 차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앞서 달려가는 독일을 보고만 있을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아니다. 미국은 쉐보레 볼트로 가장 현실적인 미래차를 제시했다. GM이 2007년부터 공들여온 볼트는 휘발유 엔진과 전기 모터를 함께 쓰지만 하이브리드는 아닌 독특한 전기차다. 하이브리드와 달리 볼트는 전기 모터만으로 시속 160km까지 낼 수 있다. 게다가 전기 모터만으로 커버할 수 있는 주행 거리도 80km나 된다. 이는 GM의 사전조사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인데, 그에 따르면 도심지 거주 미국인의 75퍼센트가 하루 65km 이내를 주행한다. 전기 모터만으로 한 번에 80km를 달릴 수 있는 볼트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완벽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충전도 가정용 소켓에 꽂아서 할 수 있다. 휘발유 엔진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보조 역할만 한다.
최고의 양산형 EV, 닛산 리프
하이브리드의 강자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여전히 하이브리드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전기차 양산과 시판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3세대에 이른 토요타 프리우스와 2세대로 진화한 혼다 인사이트는 여전히 현존하는 최상의 하이브리드다. 닛산 리프는 108마력의 전기 모터를 얹은 순수 전기차다. 한번 충전하면 최장 160km를 달릴 수 있으며 최고속도는 시속 145km에 이른다. 일상생활에서 쓰기에 손색없는 수준. 현재 북미에서 시판 중이며 쉐보레 볼트와 치열한 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차들을 볼 때마다 영어에 썩 능통하지도 않은 일본인들이 브랜드나 차 이름은 어쩌면 그렇게 잘 짓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작명의 중요성은 해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대단한 신기술 같지만 알고 보면 하이브리드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닌 기술이다. 자동차산업 초창기 전기 모터에서 내연기관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100여 년 만에 전기차로 되돌아가고 있는 흐름이 신기하다. 세상만사는 결국 돌고 도는 법. 교통수단은 언제나 그때의 사회상을 정확히 반영하며 발전해왔다. 그렇게 본다면 미래 자동차의 대안으로 꼽히는 전기차는 단순히 구동기관뿐 아니라 차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 대가족 중심에서 소가족 체제를 거쳐 이제는 1인 가족 시대로 가고 있는 트렌드는 BMW나 폭스바겐이 구상하는 초경량-소형 전기차와 맞물려 개인 이동수단Personal mobility의 시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개인의 이동 욕구를 변함없이 충족시키면서 낭비적인 사회 문제와 공해 문제 등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도 될 수 있다.
어쨌든 미래 자동차 세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과 확연히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미래에는 프로그램 세팅에 따라 자동차는 알아서 가고 탑승자는 달리는(혹은 날아가는?), 혹은 차 안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이메일을 쓰고 심지어 차를 한 잔 마시며 휴식도 취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은 “세상에, 옛날 사람들은 차를 직접 운전했대!”라며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날아가는 차도 좋고 알아서 가는 차도 좋다. 자동차의 발전은 다 좋지만 운전 재미가 사라진다면 슬플 것 같다. 설령 운전할 때마다 애써 졸음을 쫓아야 할 만큼 조용한 전기차의 시대가 온다 해도, 차가 알아서 가게 내버려둔 채 태블릿 PC만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허벅지를 찔러가면서라도 직접 운전하는 편이 더 낫다. 적어도 2012년 오늘을 사는 내 기분으로는 그렇다. 20세기에 태어나 1950~60년대 이탈리아 차에 열광하며 성장해서 21세기의 자동차기자가 되어 꿈같이 먼 미래형 차를 예측하며 살아야 하는 정서적 괴리감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