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에 미국-이란 ‘3차 세계 대전’은 없었다
지난 1월 3일 미국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로 ‘3차 세계 대전(WWIII, World War Three)’이 급부상했다.
3일은 이란 군부 최고 실세이자 지도자인 이란혁명수비대(IRGC) 거셈 솔레이마니(Qussem Soleimani) 사령관이 미국 드론 공격으로 피살된 날이다.
이날 국제유가는 일제히 상승해 그 전날 대비 배럴당 2달러 이상 올랐다.
8일은 솔레이마니 사령관 피살에 대한 이란 측의 보복이 단행됐다.
이란은 이라크내 미국 공군기지 Al Asad와 Erbil 두 곳에 탄도 미사일 십여 발을 발사했다.
전 세계가 우려하는 제 3차 대전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고 국제유가는 상승세를 이어갔다.
두바이유는 1배럴에 70달러를 목전에 뒀다.
그런데 이후 유가는 하락세로 반전됐고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오르락내리락 시소 타는 와중에 미국과 이란 갈등 이슈는 보이지 않는다.
이란 미사일 공격 이후 유가는 하락
1월 22일 기준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1배럴에 64.26달러로 마감됐다.
미국-이란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8일의 69.65달러와 비교하면 5.39$/B 떨어졌다.
그 사이 미국과 중국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
서로 보복 관세를 부여하며 갈등을 빚어온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 합의에 서명했고 2단계 협상에 착수한 소식이 유가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양 국간 무역 갈등이 해소되면 세계 경기가 호전되고 석유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미국 – 이란 분쟁 이슈를 덮었다.
또 다른 날,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이 하향 조정되고 석유 공급 과잉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유가는 떨어졌다.
유가 동향만 고려하면 ‘3차 세계 대전’ 위기감을 고조시켰던 미국과 이란 무력 갈등은 더 이상 산유국이 밀집한 중동 지역 리스크가 되지 못하는 양상이다.
미국 EIA, 일시적 리스크로 해석
미국 에너지 정보청(EIA)이 내놓은 보고서에서도 미국- 이란 간 긴장 요인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EIA는 단기 에너지 전망인 STEO(Short-Term Energy Outlook)를 매월 발간하는데 가장 최근인 1월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국제유가가 지난해보다는 오르는데 그 폭이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됐다.
EIA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64.36$/B를 기록했던 브렌트유는 올해는 0.47달러 오른 64.83달러로 점쳐졌다.
WTI 역시 지난해 평균 57.02$/B 대비 2.23달러 오른 59.25달러로 예측했다.
주목할 대목은 최근의 미국-이란 간 피격과 공습 등의 영향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EIA는 최근 발생한 지정학적 사건으로 원유 가격 프리미엄이 발생해 올해 초 수개월 동안은 원유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EIA가 제시한 지정학적 사건은 지난해 5월 페르시아만과 홍해를 경유하던 사우디 유조선 공격, 9월 발생한 사우디 석유 인프라 미사일 공격 그리고 최근의 미국과 이란 간 긴장 국면 등이다.
하지만 지정학적 리스크 프리미엄이 감소하면서 갈수록 국제유가가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가 동향 헤드라인에서도 사라진 ‘분쟁’
석유공사가 발간하는 일일 국제유가 동향 헤드라인에서도 미국-이란 간 분쟁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 3일 국제유가는 중동지역 긴장 고조 등으로 상승
# 6일 국제유가는 미국의 공습 이후 중동 지역 긴장 지속 등으로 상승
그런데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국 공군 기지를 미사일 공습한 이후 국제유가는 오히려 하락세로 반전됐다.
# 8일 국제유가는 이란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대응 가능성 후퇴 등으로 하락
# 9일 국제유가는 전일 미국의 대이란 무력 대응 철회 영향 등으로 하락
미국과 이란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힘을 얻으면서 하락세로 전환된 국제유가는 이후 다른 이슈 영향으로 보합세를 보인다.
# 16일 국제유가는 미-중 1단계 무역 합의 서명 등으로 상승
# 21일 국제유가는 IMF의 세계경제성장률 전망 하향 조정 등으로 하락
# 22일 국제유가는 IEA의 상반기 공급과잉 전망 등으로 하락.
3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것처럼 무력 충돌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 – 이란 사태가 국제유가 이슈에서 밀려난 데는 양국 간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란 영웅 피살에도 유가 잠시 흔들렸을 뿐…
미국이 피살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IRGC) 쿠드스군 사령관은 이란 국민 영웅이다.
지난 1980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촉발된 8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결정적인 장면에서 솔레이마니가 등장한다.
이란혁명수비대 소속이던 솔레이마니는 이란-이라크 전쟁 말미 결정적인 호람샤르 전투에서 이란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미국의 자존심을 구겼다.
이후에도 솔레이마니는 이란혁명수비대 산하 특수부대인 ‘알 쿠드스(Al-Quds)를 22년간 지휘하며 내전 중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등에 민병대를 지원하고 이란이 맹주인 이슬람 시아파 벨트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며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런 솔레이마니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드론 미사일로 무참하게 살해했다.
가뜩이나 미국발 경제 제재로 파탄에 내몰리고 있는 이란 국민들은 ‘피의 복수’를 다짐했고 급기야 이라크 내 미군 기지를 공습한다.
하지만 전 세계 원유 저장고이자 동시에 화약고인 중동 한복판의 포성 속에서도 국제유가는 정점을 찍고 하락세로 반전했다.
신의 대리인 ‘미국에 대한 응징’ 멈췄다
‘왕정(王政)’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체제가 바뀐 이란은 현재까지 ‘신정국가(神政國家)’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 시절 이슬람 성직자들은 세속적 권한을 제한당했다.
하지만 이슬람 성직자였던 호메이니가 지난 1979년 민중봉기를 업고 이슬람 공화국을 창시하며 왕정이 종식됐고 현재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에 이르기까지 신정국가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란은 대통령 직선 체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슬람 성직자인 이란 최고지도자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인준하거나 해임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최고지도자’는 이란의 사법부와 행정부는 물론이고 군부까지 통제하고 있는데 솔레아마니 사살 이후 이라크 내 미군기지 공습을 결정한 것 역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절대 권력 ‘신의 대리인’은 이후 미국에 대한 응징을 멈췄다.
추가적인 무력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양새만 갖춘 피의 응징?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미사일 십여 발을 퍼부었지만 단 한 명의 미군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미사일 공습으로 주둔 미군 34명이 뇌진탕이나 외상성 뇌 손상(TBI)을 겪었다는 사실이 최근 보도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피해가 크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미군기지 공습 이전 이란 측에서 미사일 공격 작전을 이라크 정부에 사전 통보했다는 점에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실리고 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 피살에 대한 피의 응징을 요구하는 이란 국민 정서에 호응하기 위해 이란 최고지도자는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은 피하고자 공습 사실을 사전에 알렸고 미군 사망을 막는 정략적 노림수가 있었다는 해석이 높다.
미군 기지 공습에도 불구하고 미군 사망자가 없었다는 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지를 넓혀줬다는 평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미사일 공격 이후 군사적 대응 대신 더욱 강력한 경제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피의 응징’ 보다는 ‘경제 복원’이 더 절실
8일 이란 혁명수비대가 우크라이나 민간 여객기를 적기로 오인, 격추해 17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이란 정부에 또 다른 악재가 되고 있다.
자국인들이 대거 탑승한 민항기를 피격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다 들통난 사건은 ‘반미’에 쏠려 있던 이란 국민 정서가 ‘반정부’로 옮겨 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방 제재로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이란에서는 지난해 11월 이후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이목이 반미 정서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민항기 격추 은폐로 이란 정부는 다시 국민의 뭇매를 맞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정부는 미국과의 무력 대결 대신 협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란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은 독일 언론 매체인 슈피겔에 보도된 지난 25일 인터뷰에서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해제하면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재를 해제한 뒤 협상장에 나올 수 있다. 우리(이란)는 여전히 협상장 안에 있다. 그들이 떠난 것’이라고 말했는데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죽음 뒤 미국과 협상 가능성이 사라졌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점에서 국민 영웅 피살에 대한 피의 응징보다는 경제 제재를 푸는데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불안 요인은 잠재
재선을 노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란과의 무력 대결 부담이 크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지난 2003년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부시 대통령 지지율이 재선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미국민들의 반발을 산데 대한 학습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과 이란이 과거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처럼 전면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신 페르시아만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중동산 원유의 숨통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방과 이란 간의 갈등 요인은 남아 있다.
이란 앞바다로 약 50km 너비에 불과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30%가 통과한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서면 ‘3차 세계 대전’ 대신 ‘3차 오일 쇼크’는 불러올 수 있다.
이 때문에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 등의 선박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미국 중심의 ‘호르무즈 연합방위체(IMSC, 국제해양안보구상)’가 구성된 상태이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거나 충돌을 야기하는 것 역시 미국과의 무력 분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다만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카드 정도로는 활용할 수 있어 보인다.
헤즈볼라를 비롯해 친이란 시아파 무장투쟁 세력들의 국지적인 분쟁도 잠재적인 중동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중동의 지정학적 변천사를 고려하면 현지에 민주주의를 이식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미국 중심의 서방 개입, 친미와 반미 중동 국가 간 반목과 갈등, 이슬람 무장혁명 세력들의 암약 등에서 비롯되는 리스크를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이들 리스크가 일정 수준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자제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 여부가 세계 원유 시장과 가격 안정의 변수로 작동하는 것은 앞으로도 불가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