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녀의 불순한 자원봉사기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은 본인들의 고단한 어린 시절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끔 ‘보릿고개’ 시절을 이야기하시곤 하면, 먼 나라 이야기 같기만 하던지요. 해서 내가 부모가 되면 그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넘치는 책이며 학용품이며 아쉬울 것이 없으니 채워야 할 의욕도 없어진 것 같은 우리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걱정이 앞섭니다. 가뜩이나 5월 중간고사 끝났다고 휴대전화와 MP3를 끼고 사는 중2 딸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아니라 속이 끓습니다. (물론, 늘 바쁘다는 핑계로 세심히 다듬어주고 짚어주지 못한 제 탓도 크지만요.)
‘노력해서 얻을 줄을 몰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아이고…’
자원 아니, 권유봉사의 시작
회사가 창립기념일 즈음에 펼치는 봉사활동에 마음만 있었지 뭉그적거리기만 한 게 벌써 몇 년 됩니다. 그런 망설임을 떨치고 참가신청 메일을 보낸 것은 아마도 몸은 다 컸으나 철딱서니 없는 딸내미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게죠.
다음 주 토요일에 복지관 친구들이랑 하루를 보내자는 말에 딸은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특히 북한산이라는 말에는 정색을 합니다. 동네 인근의 둘레길을 1시간 걷는데 헉헉거리다 아무 가릴 것도 없이 덜컥 길 가운데 퍼질러서 엄마를 한없이 오그라들게 하는 전력이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죠. 그래서 확실하게 미끼를 던졌습니다. “올해 자원봉사 시간 채워야 하잖아?” 그제야 수긍모드로 넘어갔습니다. 결사반대는 아니구먼, 휴~
이렇게 해서 우리 모녀는 회사가 매년 창립기념일을 기념해 복지관 장애우들의 하루 나들이를 돕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회사가 국립공원과 연계한 덕분에, 올해는 아름다운 북한산, 덕유산, 지리산 3곳에서 동시 진행되었습니다. 자~ ‘GS칼텍스와 함께 하는 우리 서로 하나되기’ 참가 준비 완료!
토요일 아침, 딸의 얼굴이 밝습니다. 만날 티격태격하는 엄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둘이 나서는 길이 나들이 같은 모양입니다. 별수 없는 아이지요.^^
서둘렀던지 약속시각보다 20분 먼저 도착해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몇몇 선배님들은 온 가족이 출동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부러워라~ 놀토에 부모를 따라나선 기특한 고등학생, 중학생도 있고, 또 몇 해째 가족이 함께 참석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예정했던 10시보다 30분이나 빨리 북한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북한산 오봉의 자태에 가슴이 탁 트입니다. 날씨는 청명하고 하늘은 높고 야호!… 황사가 심하니 함성은 날리지 말고 눈으로만 보자던 사회공헌팀 윤 부장님의 농담 덕분에 기다리던 일행은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중요한 손님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요? 오늘 우리들의 짝꿍들이 조금 늦어지나 봅니다. 마지막 버스까지 기다리다 보니 11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들의 짝꿍들 70여 명이 4대의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우리 모녀의 짝꿍은 누구일까? 기대 반 설렘 반.
초보 자원봉사모녀, 가수 노씨와 새침 장양을 만나다
저의 짝은 스물셋 아리따운 노씨 아가씨고요, 딸의 짝은 열네 살의 예쁘장한 장양입니다. 제 짝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딸의 짝은 자그마한 체구에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소녀처럼 수줍게 인사를 합니다.
회사와 함께 오늘 행사를 마련해주신 북한산 국립공원측에서도 많은 분이 나왔습니다. 특히 조마다 산길을 걸으며 만나는 나무와 꽃, 소리를 알려주는 안내를 해주신다고 합니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등산객이 많은데 우리 일행170여 명까지 더해져 길을 꽉 메우고 올랐습니다. 안내원 언니가 병꽃이랑 산초나무를 알려줍니다. 딸의 짝은 관심 있게 알아 듣고 대답도 꼬박꼬박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또 안내원 언니가 대준 헤드폰으로 계곡 앞 새소리, 물소리도 들었습니다.
제짝은 그동안에도 노래를 열심히 불러서 제가 드디어 그 멜로디를 알아냈습니다. TV에 많이 나오는 대리운전 광고음악이더군요.. 77로 끝나는… ㅎㅎㅎ 보조를 맞추느라 하두 77을 외쳐댔더니 절대 잊힐 것 같지가 않아요. 이제부터 가수 노씨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딸의 짝, 새침 장양은 묶고 있던 머리끈이 못 쓰게 되어 난감했는데, 옆의 봉사가족 어머니께서 얼른 손수건을 빌려주셨네요. 다시 장양의 외모가 살아났습니다. 새침 장양!
오봉을 배경으로 짝꿍끼리 사진도 찍으며 올라오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조별로 자리를 잡고 앉아 나눠준 가방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수 노씨도 손을 잡고 곰 한 마리를 다 그렸습니다. 두리번두리번 배가 고플 때가 되었지요^^ 새침 장양은 다양한 색으로 꾸미더니 색칠까지 꼼꼼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 맛있는 도시락이 배달되었습니다. 가수 노씨도 이때만큼은 노래 뚝! 준비된 도시락은 뚝딱 비웠습니다. 먹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맑은 눈빛이네요. 점심을 다 먹고 나니 놀이시간입니다.
북한산 안내원 언니 오빠들이 준비에 분주합니다. 먼저 줄다리기! 의욕은 넘치나 몸은 따라가지 않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연출됩니다. 우리 조는 단번에 탈락. 새침 장양이 매우 아쉬워합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3조가 우승.
다음은 2인 3각 달리기! 짝과 보조를 맞추며 뛰는 모습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가수 노씨는 안 하겠다고 하네요. 결국, 옆자리에 앉아 열심히 응원만 했습니다. 어라, 또 3조가 우승. 옆 조는 서로 대표를 하겠다고 다툼도 하네요. 적극적인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박터뜨리기! 콩주머니로 터뜨리나 생각했는데, 재미있게도 물총으로 터뜨리는 거라네요. 박을 붙인 종이를 물에 적셔 떨어지게 하는 것인데, 봉사자나 참가자나 서로 물총을 쏘며 노느라 정신이 없네요. 우리 조는 또 탈락, ㅎㅎㅎ
점심 먹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가수 노씨는 누군가 남겨둔 음료수 한 병을 단 5초 만에 마셔버리는 신공을 발휘! 저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제 짝의 기대대로 또 다시 간식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바나나와 쭈쭈바~ 남은 바나나 송이를 새침 장양의 가방에 넣어주었습니다. 돌아가서 먹으라고요. 녹아버릴까봐 걱정이지만 딸이 다시 얼려 먹으면 된다고 우겨서 쭈쭈바도 넣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탈이 날까봐 자꾸 맘에 걸리네요.
딸이 제 짝을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주고 쭈쭈바 챙겨주는 걸 보니 서로 정이 드는 모양입니다. 제 짝도 저한테 자꾸 뽀뽀해줍니다. 저한테도 뽀뽀해달래서 얼른 해주었는데 영 반응이 신통치 않은데요.
간식을 먹고 북한산 안내원들로 구성된 도토리 악단이 펼치는 음악회 시간입니다. 참 다채롭게도 준비해주었네요. 노래들을 자세를 취하니 제 짝이 신발을 챙겨 신습니다. 이제 끝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아는 모양입니다. 마음이 쿵. 아직 신발 신지 말라고 다시 벗겨주었습니다. 마법의 성도 부르고 아름다운 세상도 따라 불렀습니다. 가수답게 멜로디를 잘 알더라고요. 노래를 부르다가 가수 노씨가 저에게 또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이름처럼 귀엽고 예쁜 악단의 음악회가 끝나고 기념촬영. 딸이 제 짝을 사진 잘나오라고 한가운데에 앉혔습니다. 그러자 제 짝이 너무 쿨하다고 투덜댑니다. 친한 척 안 해준다네요. 딸은 서운한지 모르겠지만 새침 장양의 입장에서는 다르겠지요.
마음의 귀로 듣지 못해 미안해요
기념촬영을 끝내고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안아주고 헤어졌습니다. 버스가 움직이자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고 나니 마음이 허탈하군요. 가수 노씨, 새침 장양!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더 재미있게 못 놀아준 거 같아 미안해집니다.
제 짝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랑 인사도 못했고 제가 종일 77을 따라부르며 이름을 불렀지만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만날 시간과 헤어질 시간은 알아채더군요. 헤어질 걸 알고 미리 뽀뽀로 인사해주었구나 하는 걸 알겠습니다. 말로만 하는게 소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수 노씨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원하는 소통을 제가 못해주는 것일 수 있지요. 그녀는 무심한 척 눈으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데 저는 말만 알아듣는 게 아닐까?
소리내어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들이 자기 식에 맞춰 오늘 하루를 보낸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되짚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이 내년에도 오겠다고, 새침 장양이 있는 복지원에 가봐야겠다며 오늘 찍은 즉석사진을 냉장고 옆에 붙여두었습니다. 딸은 오늘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요?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노력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요?
딸은 몇 시간짜리 자원봉사 인증서를 받게 될 거고, 저는 딸이 뭔가를 느꼈기를 기대하겠지요. 어떤 모녀의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된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짝이랑 의사소통을 못한 것처럼 우리 딸과도 그런 게 아닐까? 딸의 입장에서, 오늘 저랑 같이 놀아준(!) 가수 노씨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갈등도 불편도 없는 거 아닐까?
저희 가족 같은 초보자들에게 귀한 기회를 마련해준 사회공헌팀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북한산 국립공원 여러분도 정말 고맙습니다. 북한산이 이렇게나 가깝고 좋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체구의 짝꿍과 벗하느라 기운에 부치는데도 짝꿍의 화장실 뒤처리도 해주시고, 종일 짝을 껴안고 계시다시피 하시면서 저를 감동케 해주신 저의 동료 가족 여러분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