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두 남자, 정인홍과 이원익 – 선비는 무엇으로 사는가?

역사에서 배우다13 – 선비는 무엇으로 사는가? 정인홍과 이원익

 “한 번 소인배가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말이었습니다. 여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면 “예끼!” 하고 버럭 소리치고 말 일이겠지만, 당대 최고의 존경받는
원로 이원익의 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대신은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비록 변변찮은 사람입니다만, 어떻게 소인배를 목표로 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인배’라면 글 꽤 배웠다는 선비들 사이에서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조선에서 상대 당파를 가리켜 욕하며 부르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의 우두머리

 “저는 정인홍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염도 눈썹도 온통 하얀 이원익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나직이 설명했습니다.

 “그처럼 마음이 곧고 매사에 엄격한 사람은 없었습니다.고 그른 것에 대해 추호의 양보도 없었지요. 그러나 너무 곧기만
했어요. 너무 곧으면 오히려 지나치게 되죠.마침내 주위 사람들의 충동질에다 반대 당파에 대한 미움에 혹해, 그만 모후를
폐위하자는 주장에 찬성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항상 그를 생각하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고 애쓴답니다.”


내암(萊菴) 정인홍(1535~1623)과 오리(梧里) 이원익(1647~1634)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비, 정치인들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했고, 또한 각기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의 우두머리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허망한 공리공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인 개혁을 중시했습니다. 이원익은 대동법 실시와 병역제도 개혁의 주역이었고, 정인홍은 서양문물 도입과 문∙무의 균형 확보를 지론으로 삼았습니다. 두 사람은 광해군 초기에 번갈아 정승을 하면서, 대동법, 호패법, 동의보감 편찬 등 당시의 실용적 개혁들을 총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불꽃같이 강직한 정인홍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판이했습니다. 정인홍은 단지 골방에 앉아 책만 보는 지식인이 아니었고, 임진왜란 때는 직접 칼을 들고 의병장으로 활약했을 만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좋게 보면 강직했고, 나쁘게 보면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잘 용납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같은 동인(東人)이던 북인과 남인이 둘로 갈라지게 된 것도 정인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킬 뿐 아니라 광해군 정권 자체가 뒤흔들리는 파국을 자초합니다.
정인홍은 그의 스승 ‘조식’이 문묘에 배양되지 않자 ‘회퇴변척소’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는 광해군 3년(1611) ‘회퇴변척소’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회퇴’란 이언적(회암)과 이황(퇴계)을 가리키는데, 당시 공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선비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었고, 그 선비의 제자들에게도 더 없는 명예였습니다. 그래서 제각기 자신의 스승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운동이 끊이지 않았는데, 당시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에 배향되고 정인홍의 스승인 조식은 빠져 버렸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정인홍이 격렬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정인홍에 따르면 간신 윤원형이 정권을 쥐고 있던 시대에 조식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며 지조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이나마 이언적, 이황은 벼슬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더러운 자들”을 문묘에 배향함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일대 평지풍파를 일으켰고, 당시 다수였던 이언적과 이황의 제자들은 일제히 ‘타도 정인홍’을 부르짖었으며, 정인홍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던 광해군까지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실로 정인홍의 상소 한 장은 인조반정의 불씨를 남겼던 것입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이원익

반면 이원익은 언제나 조용했고 온화했습니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일이 없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라면 반론을 펼치기보다 조용히 물러나곤 했습니다.

광해군 초기에 그는 영의정을 지내다가 3년 동안에 무려 83번이나 사직했습니다.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조정에서 반대 의견이 많을 때면 아무 소리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지나쳤소. 당신이 옳았소.” 하는 사과와 함께 다시 복직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게 마련이었습니다.

다만 그가 자기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고 맞섰던 때가 한 번 있었는데, 바로 ‘폐모론’이 불거질 때였습니다. 정치적 반대파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광해군과 대북파의 뜻은 효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던 당시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결국 귀양을 갑니다.

폐모론, 인목대비
폐모론은 인목대비에 대한 폐위를 말합니다.
한편 이원익의 말과는 달리 정인홍도 이번만큼은 폐모론을 대놓고 긍정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반대하지도 않았고, 폐모론의 주역은 모두 그의 제자와 측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정인홍은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길바닥에 끌려가 사지가 찢기게 됩니다. 반면 귀양에서 풀린 이원익은 새 정권에서 다시 영의정을 지냈고, 이후 10여 년 동안 부귀와 존경을 누리며 살다가 죽은 후에도 인조의 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정인홍과 이원익,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바람직할까요? 요즘에는 광해군과 함께 정인홍을 재평가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정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개혁가의 귀감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한편 이원익은 기회주의적이라고, 지나치게 몸조심만 한다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룻밤에 모든 것을 개혁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말도 듣고, 현실을 돌아보면서 추진하는 개혁이어야 참된 개혁이 아닐까요? “한 번 소인배가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원익의 말을 오늘날 우리는 농담으로만 들을 수 없습니다. 물론 ‘무엇을 위해’ 소인배가 되는지가 문제겠지만요.

GS칼텍스 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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