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리뷰 ]
스크린에 그려진 석유의 이면
석유 에너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되다
최근 ‘석유 고갈론’이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재기되기도 했는데요. 믿기시나요? 미국의 경제, 에너지 전문가인 윌리엄 엥달의 주장에 따르면, 석유는 유기물 사체에서 기인하는 화석연료가 아니라 고갈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탄화수소물인 석유가 유한하다는 지질학계의 오랜 믿음을 배반하는 충격적 이론인데요.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석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세계적 다툼의 흑역사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제임스 딘이 영화 <자이언트>에서 갑자기 솟아난 ‘검은 금’ 석유를 뒤집어쓰고 기뻐 날뛰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영화 속 이미지를 쉽게 떨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명령으로 행성에 파견된 <아마겟돈>(1998)의 유정 굴착 전문가 브루스 윌리스는 그때, 분명 스크린 속 영웅이었지 말입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015)
영화의 배경은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지구의 미래 입니다. 석유를 둘러싼 전쟁의 끝,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바로 생존에 필요한 물을 독점한 임모탄과 광활한 땅을 오갈 수단인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움직일 수 있는 석유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몇몇의 사람이 자원을 통제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지옥도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임모탄은 차라리 신에 가깝게 그려지는데요. 그를 중심으로 석유를 통제한 도시의 시장은 부를 축적하고, 폭압과 독재가 일상이 되는 세상입니다. 반면 인간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데요. 방사능 오염으로 돌연변이가 되었거나, 멀쩡한 사람들조차 물과 식량이 부족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입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이런 인류를 마치 좀비처럼 그리고 있는데요. 자원의 고갈로 불과 한 세기 뒤에 이런 지옥도가 펼쳐진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원시시대가 연상되는 풍경입니다.
[ Mad Max: Fury Road ]
이 악몽을 끝내 줄 영웅은 핵전쟁으로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남자 맥스(톰 하디)입니다.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간 그는 임모탄의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와 연합하여 그에 대적하는데요. 황무지 사막 위, 석유를 운송하는 유조차, 석유를 탈환하려는 약탈자들의 ‘미친’ 질주 속에, 자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입니다.
007 언리미티드 (The World Is Not Enough, 1999)
스토리라인에 송유관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영화! 석유계의 거물인 로버트 킹이 폭발 사고로 죽자,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가 그의 딸인 일렉트라 킹(소피 마르소)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요. 재미있게도 이 사건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사실 로버트는 과거에 딸이 테러범에게 납치 되었을 때, ‘테러범과 협상할 수 없다’는 권고를 듣고, 딸의 몸값 지불을 거부한 전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낀 딸은 자신을 납치한 범인과 결탁해 아버지를 해하고 송유관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요. 이스탄불을 폭발시키고 석유의 이동통로를 차단하여 송유관 독점을 꿈꾸다니, 정말 대범한 계획입니다. 본드는 일렉트라가 꾸미는 이런 거대한 음모를 깨닫게 되고, 핵폭탄 터뜨리는 것을 제지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렉트라와 결탁하고 하수인이 된 테러리스트는 핵탄두에서 빼낸 핵물질, 플루토늄과 원자력잠수함을 이용해 세계 석유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하는데요. 원자력 잠수함이 폭발하면 원유공급망이 방사능 물질로 오염될 것이고,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 The World Is Not Enough ]
자원의 고갈과 핵의 위험이 007 시리즈에 있어서는 일종의 전환이 된 건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냉전시대가 종식되면서 더 이상 그 갈등으로는 이야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된 게 첩보영화 007의 운명이었지요. 본드의 무용론이 재기될 시점에 시리즈는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또 다른 요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거대재벌의 독식, 마약전쟁과 더불어 원자력 시설에 대한 테러의 가능성, 원유 공급망을 장악하려는 이권 다툼을 통해 본드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임무, 즉 새로운 일거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007 시리즈에는 이렇게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세계자원 정치학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8)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사막에서 살아가던 가난한 광부 다니엘(대니얼 데이 루이스)은 처음엔 그저 평범한 광부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석유 유전을 발굴하면서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게 되는데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과해진 그는 석유 시추업자로 업종을 변경하여 땅을 사들이고, 유정탑을 쌓으며 야욕을 점점 키워 나갑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의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도, 그것이 영광의 나날인 것도 잠시 뿐입니다.
[ There Will Be Blood ]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악조건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석유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게 되면서 부는 쌓았지만 정작 그의 생활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는데요. 야망이 탐욕과 폭력으로 바뀌는 가운데, 사랑과 존경, 신앙, 가족, 공동체 의식 같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은 그에게서 하나 둘 사라지고 맙니다. 과연 성공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자원, 돈 이런 것들을 손에 넣는 것일까요? 맹목적인 탐욕이 불러온 파멸 앞에서 씁쓸함이 더해집니다.
프라미스드 랜드 (Promised Land, 2013)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자원을 둘러싼 국제정세, 끝나지 않는 이권 다툼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무공해 영화입니다. 간단하게 도식화 시켜서 보자면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압파쇄방식(Hydraulic fracturing)은 농가에 돈을 지급해주는 방식이지만,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땅을 오염시키는 좋지 않은 방식입니다.
[ Promised Land ]
영화는 프래킹의 동의를 얻는 임무를 띠고 펜실베니아 주의 시골 마을로 파견된 천연가스추출 전문 회사의 간부 스티브 버틀러(맷 데이먼)가 겪는 선택의 문제를 그리고 있습니다. 버틀러는 뜻하지 않게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그가 가진 생각의 변화와 선택에 집중하는데요. 환경문제는 돈과 이권이 결부된 탓에 단순히 착한 마음으로 인정에 호소한다고 해서 쉽사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 문제가 단순히 선악의 대결로 도식화할 수 없다는 것, 함께 고민할 문제라는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석유 자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영화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우리가 에너지를 사용하는 한, 자원을 둘러싼 세계의 크고 작은 분쟁은 지금처럼 지속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토대로 한 영화도 끊임없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중한 우리의 에너지원이 인간을 좌지우지 할 뿐만이 아니라, 밑바닥에 감추어 있던 인간의 탐욕까지 드러낸다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이겠지요. 결국 석유 자원이 인류를 위한 필수적인 에너지원인 만큼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하게 될 지 궁금합니다.